‘천국’과 ‘지옥’
웹 서핑을 하다 보면 종종 ‘헬조선’이라는 말을 접합니다. 다들 아는 것처럼 ‘삶이 지옥 같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한편에서는 이 소리를 패배자들의 불평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매도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사용합니다.
2017년 12월 10일 자 코리안 헤럴드(The Korean Herald)에 “한국인이 헬조선을 떠나려는 이유 (Why Koreans want to leave ‘Hell Joseon)”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인크르트에서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진행한 여론 조사 결과, 응답자의 62.7%가 ‘헬조선’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54%가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는 답변을 했답니다. 가장 가고 싶은 나라는 캐나다로 25.2%이고, 뉴질랜드(21.2%), 싱가포르(8.6%), 호주(8.1%)가 그 뒤를 잇습니다.
이민 가려는 이유를 보면 단지 치열한 경쟁 때문만은 아니랍니다. 특권층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사회 구조와 그로 인한 좌절감과 무력감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한국이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며, 학벌이 좋지 않거나 부모가 부유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삶의 질’과 ‘삶의 양’
삶의 질 (QOL, Quality of Lif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29년, 영국의 후생경제학자 피구(Pigou)가 처음 언급한 것으로, 이후 GDP와 같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지표들로 대변되는 삶의 양(Quantity of Life)과 대비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행복과 삶의 만족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이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속옷 없는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질은 의식주와 교육과 의료 서비스 같은 물질적인 풍요에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물론 정치적인 안정과 자연환경, 사회적 스트레스와 가족 유대관계 같은 정신적인 면까지 아우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개인 혹은 집단의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그 개인이나 집단이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그런 물질적 풍요를 얻고 누리는 데 차별이 없어서 스트레스도 없으며 대인 관계도 원만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생활 수준이 높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세상 어떤 나라들이 ‘헬국가’가 아닌 ‘헤븐국가’일까요? 지난 1월 U.S.News & World Report에서 발표한 ‘2021년 가장 좋은 나라들’이라는 자료에 이 항목이 있습니다. 이 자료는 와튼 스쿨(Wharton School of Business)과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Y&R's BAV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여기에 ‘삶의 질’ 항목이 들어 있고, 이 항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나라는 캐나다로,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항목에서 캐나다는 지난 6년간 줄곧 1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캐나다의 삶이 얼마나 좋길래 그럴까요?
2021년, 세계에서 삶의 질이 최고로 좋은 나라 캐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좋은 음식과 집과 같은 물질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직업 안정성이나 정치적인 안정성 그리고 자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도 있습니다. 삶의 질은 이런 눈에 보이는 요소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어우러져 결정됩니다. 이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은 9가지 항목으로 삶의 질을 평가했습니다: 좋은 취업 시장, 여유, 경제적인 안정성, 가족 간의 유대감, 소득 평등, 정치적인 안정성, 안전, 질 좋은 공교육 시스템, 질 좋은 공중 보건 의료 시스템. 여유는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정도를 말하는데, 점수가 낮을수록 물가가 높은 것을 뜻합니다.
캐나다는 직업을 구하기 쉽고, 경제적인 안정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가족 간의 유대감이 좋고, 안전하며, 공교육 시스템과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답니다. 좋은 취업 시장과 정치적인 안정성은 최고 점수인 100점을 받았고, 경제적인 안정성은 99점, 가족 간의 유대감도 99점, 안전은 96.7점, 공교육 시스템은 97.8점, 공중 보건 의료 시스템은 95.9점을 받았습니다. 반면, 소득 평등은 61.6점이고, 여유는 7.7점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 ‘2021년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좋은 나라’에서 열여덟 번째 자리에 올랐습니다. ‘2020년 삶의 질이 가장 좋은 나라’ 순위는 23위였는데, 무려 다섯 계단이나 상승했습니다.
위의 9가지 평가 기준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항목은 경제적인 안정성으로 85.4점입니다. 잘 사는 나라라는 거예요.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을 가질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거예요. 그다음으로 좋은 점수를 받은 항목은 공교육 시스템으로 74점이고, 그 뒤를 좋은 취업 시장(64.6점)이 잇고, 그 뒤를 공공 보건 의료 시스템(55.7점)이 잇습니다. 나머지 항목들은 모두 50점 아래에 있습니다. 정치적인 안정성은 38.1점이고, 안전은 31.4점, 소득 평등은 7.8점, 여유는 6.8점입니다.
세계 수 많은 국가들 중에서 18위라면 상당히 좋은 성적입니다. 하지만 응답자의 62.7%가 ‘헬조선’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54%가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는 답변을 보면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삶의 질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살기 좋은 나라
위에 언급한 코리안 헤럴드 기사에서 어느 사회학자는 ‘실제로 한국은 다른 많은 나라보다 물질적인 여건이 좋지만 공평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정말 참기 힘든 것은 가난이 아니라 불평등입니다. GDP와 같은 가시적인 지표는 높지만, 국민들이 실생활에서 느끼는 불평등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사라지려면 무엇보다도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고 투명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날을 꿈꿔봅니다. 우리나라가 삶의 질 1위의 자리에 6년 이상 오래도록 머무는 그런 날 말입니다.
참고 자료: US News – Quality of Life